헤어질 결심을 한 고려아연, 그리고 붙잡고 싶은 영풍
추석 연휴 사이에, 그것도 마지막날 그야말로 치고박고치고박고치고박고 전쟁을 치른 영풍-MBK와 고려아연.
75년 동업관계였는데 3세 경영까지 오니 이제 지분은 여기저기 나눠서 승계하고 끈끈하게 동업을 유지하고 싶은 마음도 없어지는 듯. 고려아연의 결별 선언에 영풍은 놓고 싶지 않아 안간힘. 아시아 최대 사모펀드인 MBK와 손잡으면서 일이 커져버렸어요. 이 둘은 왜 이렇게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넌 것일까...
영풍과 고려아연의 관계
영풍과 고려아연의 시작은 75년 전으로 거슬러올라갑니다.
1949년 황해도 출신 장병희 창업주와 최기호 창업주가 동업해 영풍기업사라는 무역회사를 설립했는데 초기에는 농수산물, 철광석 수출하는 업무를 했다고 합니다. 부산에서 철광석을 일본으로 수출하는 충주철산개발공사 설립하기도 했고요.
영풍기업 이름을 영풍해운으로 바꿨다가 영풍상사로 변경했고, 이 영풍상사가 1970년에 국내 최초 아연 제련공장인 석포제련소 준공합니다. 경북 봉화에 위치해 있죠. 이를 계기로 비철금속 제련을 주력 사업으로 삼기 시작합니다.
1974년에 경북 울주군에 온산제련소를 세우고 아연 제련업체인 고려아연을 설립해서 고려아연이 이 온산제련소를 운영하도록 했어요.
여기서부터 업무분장이 시작됩니다. 영풍은 장 씨 일가가 운영하고요. 고려아연은 최씨 일가가 운영하기로 한 거죠.
경영주체는 나눴지만 순환출자 구조로 서로 지분을 보유하는 관계라서 '한 지붕 두 가족'이었어요.
그런데 공정거래위원회가 한창 적은 지분으로 그룹 전체를 지배하는 순환출자구조를 해소하라고 재벌들을 압박해 오면서 영풍그룹도 2018년 경에 순환출자 고리 해소에 나섭니다. 그래서 장 씨 일가는 고려아연 지분을 줄였고, 최 씨 일가는 영풍 지분을 축소했어요.
3대째 이어오던 동맹 관계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 건, 2022년 최기호 창업주의 손자인 최윤범 고려아연 회장 취임 후부터에요.
왜 싸웠을까요
지금 3세 경영까지 왔는데 장병희 창업주의 차남인 장형진 전 영풍 회장은 지금 고문으로 있고 장형진 고문의 차남인 장세환 씨도 영풍그룹 경영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고려아연은 최기호 창업주의 장남인 최창걸 명예회장, 뒤를 이어 차남인 최윤범 씨가 2022년 고려아연 회장에 취임했죠. 최윤범 회장은 야심가라는 평가예요. 재계에 인맥도 넓고 추진력도 있고요. 그래서 취임 후 여러 가지 신사업을 밀어붙입니다.
그런데 영풍에서는 "야야~리스크 굳이 져가면서 그런 신사업하지 말고 그냥 조용히 좀 지내라"라는 입장이었던 거죠. 영풍은 아직 2세 경영 중이니 최윤범 회장이 조카뻘로 느껴지지 않았을까요. 이렇게 신사업 방향성 두고 영풍과 좀 의견 차이가 생기면서 차라리 그럼 갈라서자 이런 생각을 시작하게 된 것 같네요. 그래서 계열분리 본격화.
본격적인 갈등이 시작된 계기는 바로 유상증자건.
2022년 고려아연이 신사업 투자를 위해 3자 배정 유상증자 실시했는데 한화그룹이 참여해 지분을 취득했고요. 이어 고려아연이 자사주 전량을 LG화학과 한화에 매각하면서 또 우호지분을 확보했어요. 자꾸 최 씨 일가가 우호지분을 늘려가는 걸 보는 영풍 장 씨 일가는 불안 해졌겠죠. 그래서 고려아연 주식을 매입합니다.
고려아연의 행보는 멈추지 않아요. 2023년 9월에 현대차 해외법인인 HMG글로벌에 신주 5%를 배정하는 유상증자도 실시하면서 현대차도 우호지분으로 확보했어요. 그러니 영풍 장 씨 일가는 속된 말로 화났겠죠.
양쪽 갈등이 폭발한 건 올해 주총이었어요. 올해 2월 고려아연 주주총회에 여러 가지 안건이 상정됐는데 표대결이 벌어졌습니다.
안건 중 영풍 쪽 장 씨 일가가 반대한 건 두 가지였어요. 먼저 주당 배당금을 전년보다 절반 수준으로 제시했는데 여기서 "난 반댈세" 이런 거예요. 고려아연의 최대주주고, 고려아연은 고배당주로 꼽히니 배당수입만으로도 짭짤한데 왜 줄이냐는 거죠. 고려아연은 신사업하려면 배당으로 주주들에게 환원하는 금액 줄이고 사내유보를 좀 해야 했을 거고요.
그리고 두 번째 반대한 안건은 바로 정관변경의 건이었어요. 이사회가 제삼자 배정 유상증자를 좀 더 원활하게 할 수 있도록 정관을 변경하는 안을 올렸는데 고려아연의 정관상 제3자 배정 유상증자 시 외국 합작법인에만 할 수 있도록 돼 있거든요. 이건 유상증자를 남발하면 주식가치가 희석될 테니 유증 대상 범위를 제한한 거예요. 그래서 최윤범 회장 취임 후 유상증자 대상이 한화도 그렇고 현대차도 그렇고 다 해외법인이었어요. 이걸 풀어주면 최 씨 일가는 국내 법인과 사모펀드 등을 대상으로 유상증자를 해서 더 많은 우호지분을 확보할 수 있을 테니 장 씨 일가는 기를 쓰고 막아야 했겠죠.
일단 배당안은 가결됐고, 정관변경의 건은 부결됐습니다. 정관변경의 건은 주총 특별결의 사항이었거든요. 정족수나 승인을 위한 의결권 확보를 더 많이 해야 하는. 장 씨 일가가 보유하고 있는 지분 만으로 특별결의는 무산시킨 거죠.
서린상사를 고수하라
서린상사는 고려아연과 영풍의 비철금속 제품을 유통하는 회사예요.장 씨와 최 씨 일가의 동맹을 상징하는 회사이기도.
서린상사는 최창걸 고려아연 명예회장이 설립한 회사인데 고려아연과 최 씨 일가가 지분 62.72%를 보유해 최대주주로 있고
영풍과 장 씨 일가 지분율 33.3%. 그런데 그동안 경영은 또 영풍이 했었습니다. 이상하죠. 그래서 대표도 장형진 영풍 고문 차남인 장세환 씨가 2013년부터 대표 맡았었고요.
그런데 2022년 최윤범 회장 취임 후 서린상사 인적분할을 추진합니다. 영풍 쪽 물건을 담당하는 사업부나 인력, 비철금속 트레이딩을 제외한 나머지 사업부와 인력을 떼어내서 분할 후 서로 지분을 맞교환하기로 했었죠. 존속법인을 영풍이 100% 보유하고, 신설법인을 고려아연이 100% 지배하도록 하는 방안이었어요. 서린상사 지분율 차이만큼 영풍이 고려아연에 현금을 지급하기로 했고요.
초반에는 서린상사 쪼개기가 수월하게 흘러가는 듯했어요.그런데 고려아연이 작년 현대차가 설립한 법인에 신주를 배정하는 유상증자를 취소해 달라고 영풍이 소장을 접수했고, 이게 고려아연으로 배달되면서 두둥. 양쪽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됩니다.
고려아연도 더 이상은 서린상사를 좋게 나눠가지긴 어렵다고 판단. 서린상사 경영권 확보 시도하기 시작해요.
서린상사 이사 총 7명인데 고려아연 측 4명, 영풍 측 3명이었습니다. 고려아연이 올해 3월 임시 이사회를 열고 서린상사에 신규 이사 4명 선임해 경영권 가져오기 위한 임시주총 개최를 추진했으나 영풍 측 이사 모두 불참하고 고려아연 측 이사 중에 최창걸 명예회장도 건강상 이유로 불참하면서 정족수를 못 채워 일단 불발됐고요.
고려아연이 법원에 서린상사 임시주총 소집 허가 청구해서 6월에 임시주총을 열었고, 결국은 4명 사내이사로 신규 선임하는 데 성공합니다. 장 씨 일가의 3세인 장세환 대표는 임시주총 개최 직전에 사의를 표명했고요. 고려아연 최 씨 일가의 승리로 끝난 거죠.
서린상사 두고 싸움이 벌어진 이유는 고려아연 입장에서는 지분 더 많이 갖고 있는데 왜 장 씨 일가가 경영해?
장씨 일가가 경영하다 보니 서린상사가 고려아연에 대한 서비스 소홀하다는 불만도 있었고요. 그리고 기본적으로 현금창출력도 매력적인 회사예요. 지난해 매출 1조 5290억 원, 영업이익 175억 원으로그룹 내 알짜 계열사. 온전히 갖고 싶었던 면도 있었겠죠.
고려아연은 이 즈음에 영풍을 더 이상 동업자가 아니라 경쟁자로 규정했어요. 그리고 원료 공동 구매를 포함한 인력·정보 교류 프로그램도 모두 없앤다고 밝혔는데요.
같이 원료를 구매하면 규모의 경제가 있으니 가격 협상력도 확보가능한데 이 협력관계가 깨지면 고려아연보다 규모가 작은 영풍이 더 큰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황산처리도 갈등
황산은 아연을 제련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물질인데 독성이 강한 유해물질이에요. 그동안 영풍은 고려아연 온산제련소의 황산탱크와 파이프를 유상으로 이용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고려아연이 올해 초 영풍과 황산취급 대행 계약을 연장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거죠. 그동안 고려아연 온산제련소는 20개의 황산탱크를 운영해 왔고 영풍의 석포제련소가 보내는 40만 톤을 포함해 연간 160만 톤의 황산을 처리해 왔는데요.
고려아연은 황산 처리 시설이 너무 노후화돼서 폐기해야 한다, 고려아연 자체 생산량이 늘어서 우리가 쓸 곳도 마땅치 않다
위험물질이다 보니 시민단체와 갈등도 커지고 있다.. 이런 이유를 들었어요.
실제로 고려아연이 최근 노후화한 황산 저장 탱크 철거를 진행 중입니다.황산 저장 능력이 30% 줄어들었다고 하는데요. 가끔 황산 유출로 작업자들이 부상당하고 이런 뉴스들 좀 접했을 겁니다. 그만큼 황산 처리는 중대재해로 연결될 가능성이 높은 작업이기도 해요.
그런데 영풍은 황산을 제때 처리하지 못하면서 아연 생산에 차질을 빚게 됐어요. 자체 설비를 구축하려면 7년은 필요하니
고려아연에 그래도 7년은 기다려달라고 제안했는데 고려아연이 받아들여주지 않으니 소송까지 간 것. 지난 7월에 가처분 소송을 제기했어요
이젠 고려아연 지분을 두고 경쟁
지난 12일 아시아 최대 사모펀드인 MBK파트너스가 영풍, 그리고 장 씨 일가와 주주 간 계약을 맺고 고려아연의 최대주주가 돼 의결권을 공동행사하기로 합의했다고 밝히면서 전쟁이 시작됐어요.
영풍 및 특수관계인 소유 지분 일부에 대한 콜옵션을 부여받고 최종적으로는 MBK가 최대주주 그룹 내에서 영풍 및 특수관계인 지분 보다 1주 더 갖게 되는 구조입니다.
장형진 고문은 3세 경영에 이르러 지분이 잘게 쪼개지고 승계된 상태에서 장 씨와 최 씨 일가가 공동경영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고 전제. 그보다는 글로벌 투자전문가한테 최대주주 지위를 넘겨주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다고 밝혔는데요.
이 콜옵션은 공개매수가 끝난 뒤 2년 이내, 아니면 고려아연 이사회를 장악하면 그때 발동할 계획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바로 다음날 공개매수를 선언했죠. 추석 연휴 바로 전날에. 고려아연에 대해 주당 66만 원에 공개매수하겠다!
다음 달 4일까지 진행되는데 이미 고려아연의 주가는 공개매수가를 하루 만에 넘어섰네요.
MBK는 이번 공개매수를 통해 고려아연 주식 최소 7%, 최대 14.6%까지 확보한다는 계획이에요. 공개매수 신청이 최소 7% 미만일 경우 주식을 매수하지 않지만 7%를 넘을 경우에는 전량 매수하겠다는 방침이에요.
만약 MBK와 영풍이 이번 공개매수에서 14.6%의 지분을 확보하게 될 경우 최종적으로 양측은 고려아연 지분 47.7%를 보유하게 됩니다.
이와 함께 영풍정밀에 대한 공개매수도 동시에 실시하는데요. 공개매수 가격은 2만 원, 최대 43.4%에 달하는 공개매수 응모 주식 전량 매수 계획이에요.
지금 고려아연 주가를 보면 공개매수 성공할 수 있을까. 의문이 들긴 합니다. MBK는 앞서 한국타이어 경영권 분쟁에도 끼어들었던 적 있었어요. 조양래 한국 앤 컴퍼니 명예회장 첫째 아들 조현식 한국앤컴퍼니 고문과 손잡고 한국앤컴퍼니 지분 공개 매수에 나섰는데 결국은 목표했던 물량을 확보하지 못해서 무위로 돌아갔어요.
당시 조양래 한국타이어 명예회장이 지원에 나섰고 효성첨단소재도 조현범 한국앤컴퍼니 회장 측 백기사로 나서면서 MBK 쪽에 불리한 방향으로 돌아갔었어요.
정치권도 들썩
고려아연이 지난 13일 영풍과 MBK의 공개매수에 대해 "적대적·약탈적 M&A라고 판단한다"면서 공개매수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혔어. MBK를 기업사냥꾼이라고 표현했는데. 원초적인 표현을 써가면서 MBK를 공격하고 있고, 여기에 MBK도 반박하고 해명하고 맞서면서 여론전을 심하게 치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상치 않게 정치권에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네요. 박희승 더민주 의원이 약탈적 M&A 시도라고. MBK가 중국계 자본을 등에 업고 고려아연에 대한 적대적 M&A를 시도하고 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자칫 중국 자본과 관련된 기업들이 고려아연을 인수할 경우 기술이 해외로 유출되고 핵심 인력들의 이탈이 가속화할 수 있다고 지적했고요. 고려아연의 논리 그대로죠.
김두겸 울산 시장, 그리고 울산시의회까지 나서서 적대적 인수합병으로 중국 자본에 넘어가게 되면 울산 고용시장과 시장 질서에 악영향을 끼칠 것이 뻔하다. 투기자본이라고 표현하면서 일자리를 창출하지도, 고용을 유지하지도 않는다고 주장하기 시작했어요.
사실 MBK파트너스가 홈플러스나 BHC 인수 후 폐점이나 구조조정, 가맹점주 상대 폭리, 과도한 배당 등의 전력이 있어서 기업사냥꾼의 프레임에 더 쉽게 걸려든 것 같네요.
고려아연의 온산제련소가 울산 울주군 온산읍에 위치해 있어서 울산 정치권이 다 들고일어난.
중국계 자본, 기술 유출.. 글쎄
18일 영풍과 MBK 측이 "최대주주의 경영권 강화 차원"이라고 반박자료
지난 25년간 영풍 및 장 씨 일가가 고려아연의 명백한 최대주주였고, 최 씨 일가와 지분 격차가 2배 이상인데 어떻게 적대적이냐는 논리예요.
우호지분을 빼면 장 씨 일가가 33.1%, 최 씨 일가가 15.6%라 차이가 많이 벌어져 있다는 것. 현대차나 한화, LG화학이 보유하고 있는 지분도 최 회장 측 우호 지분으로 볼 수 없다고 주장. 우호지분이면 최 회장과 의결권을 공동으로 행사하는 공동행위자임을 밝혀야 하는데이들 기업은 사업 협력에 대해서만 공시했다는 이유를 들었어요.
고려아연이 영풍으로부터 독립할 수 없는 기업이라고 강조했어요. 영풍과 고려아연은 공정거래법상 장형진 고문을 총수로 하는 대규모기업집단 영풍그룹의 계열사라는 거죠.
"중국계 자본이 펀드 대부분을 구성하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일각에서 제기하는 해외 기술 유출 등의 우려는 없다”라고 반박.
고려아연 측은 MBK와 영풍 경영진에 법적 대응을 예고했습니다. 박기덕 고려아연 대표 명의로 "MBK는 그동안 국내에서 시장 경쟁력 있는 회사를 인수한 다음 핵심 자산을 매각하거나 과도한 배당금 수령 등을 통해약탈적 경영을 일삼아왔다”라고 비판
고려아연은 또 이번 공개매수를 불법으로 판단하고 장형진 고문과 MBK 등 공개매수에 참여한 관계자들에게 모든 민형사상 책임을 묻겠다고 밝히기도 했어요. 영풍이 MBK에 고려아연 지분을 넘기는 것은 상장사인 영풍에 상당한 손해를 끼친다는 주장. 영풍 경영진에 대한 대표소송, 영풍 이사들에 대한 직무집행정지 가처분, 업무상 배임 등 형사고발도 진행할 계획이라고 합니다.
이번 지분경쟁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공개매수 성공 여부와 함께 지분 7.8%를 보유한 국민연금이 어느 쪽 손을 들어줄지예요.
최 씨 일가도 대항 공개매수에 나설 것이란 전망도 나오는데요. 19일 공시를 통해 특별관계자를 해소했으니 공개매수가 가능해집니다. 그런데 문제는 돈... 영풍과 MBK가 최소 매수하겠다는 7%를 확보하려면 1조 원에 가까운 자금 필요한데 그래서 최윤범 회장이 급하게 당일치기로 일본에 다녀왔고 일각에서는 소프트뱅크를 만나고 왔다는 얘기도 나와요.